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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들이

[종묘 살짝 겉핥기] 걷다보니 종묘, 주변을 둘러보니 월남 이상재 동상도 있고, 단풍이 아름다워 눈이 행복한 나들이 서울YMCA 황성기독청년회 일제강점기 불교 천도교 기독교 지도자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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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점심을 먹고 또 나들이를 다녔다.

생각보다 춥지 않고,

따뜻한 옷을 입었더니, 오히려 더웠다.

 

  • 이정표 : 종묘외대문, 어도(전교), 종묘광장관리사무소

 

종묘외대문을 적당한 거리를 띄워서

찍어보았다.

종묘외대문

종묘내에도 대문이 있다는 것이겠다.

마침 문이 닫혀있어서

그냥 사진만 찍고 왔다.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비둘기가 많아서 그런지

머리에 희끗한 것이 있었지만

의연한 자태와 아름다운 하늘을 배경으로

의연히 서있는 동상이 좋아보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안내판

 

 

이상재(李商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망한 해인 1927년 4월 7일 사상초유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 1957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신도비(神道碑) 비문은 정인보(鄭寅普)가 지었

encykorea.aks.ac.kr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고종 1)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거자(落榜擧子)가 되었다. 이를 개탄하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濬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안종수(安宗洙)·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1884년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이 해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때문에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며,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하여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구금·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그러나 이상재는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출판·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 놓았다.1920년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 1920년 미국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때, 이른바 제2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1922년에는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김필례(金弼禮) 등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한편,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상재(李商在))]

 

한 켠에 보이는 단풍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을 행복하게 한다.

 

마른 가지도 단풍이 달린 나뭇가지도

솔나무도 모두 어우러져

하늘을 배경으로 서로 뽐내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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